바티무
베니어와 톱밥 덩어리가 떨어지고 말 것이다.
백만장자의 눈과 마음으로 가구를 고르는 과정을 고르는 과정을 상상해보자. 그들은 내가 설명했던
그런 가구로 자신의 집을 꾸밈으로써 생길 분위기를 가늠한다. 그들은 두세 배의 비용을 지불하는 일이
있더라도, 톱밥과 아교로 대충 만들어진 커다란 가구보다 질 좋은 나무로 만들어진 궤짝이나 옷장 같은
것을 구입한다. 궤짝이 값이 싸더라도 톱밥에 베니어판을 붙여놓은 것이라면, 그것은 30년도 채 사용하
지 못할 것이다. 물이나 커피하고 흘리게 되는 날엔
톱밥으로 눌러서 만든 가구는 톱질도 못 할 뿐만 아니라 사포로 밀수도 없다.
좋은 가구는 몇 번이고 표면을 깎으면서도 사용 할 수 있다. 왜 부자들이 가구를 다시 다듬고 정돈하
겠는가? 그들은 가구를 쓰다 버리는 소비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쓰던 가구에 흠집이 났다고 해서 새 가
구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내 설문에 응했던 백만장자의 거의 반수 정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구를 새로 구입하는 대신 다시 수리하고 천을 바꿉니다.
억만장자인 클로리스 렉터 부인은 언젠가 나에게 자신의 집에 있는 모든 가구를 다시 수리하고 천을
바꿨다고 했다
새 가구를 사려고 몇 시간 동안 매장을 돌아다녀 봐도 값만 터무니없이 비싸고, 물건도 좋지 않더라
구요. 이게 훨씬 덜 번거롭죠.
렉토 부인은 솜씨 있는 가구 천갈이 업체와 가구 수선업체 연락처를 쭉 모아왔다.
제가 전화를 하면, 그들은 견본을 보내주고 가구를 실어가요. 매장에 갈 필요도 없고, 흥정하느라 실
랑이를 벌일 필요도 없지요.
그녀가 애용하는 단골 천갈이 집에서는 아주 다양한 천 견본을 보여준다. 렉토 부인은 천을 고르는
것이 가구를 고르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30년 동안 5번에 걸쳐 단골 수선집에다 그
녀가 좋아하는 소파의 천갈이를 맡겼다.
제임스 해거티와 로버트 버너가 작성한 뉴스 기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소파에 앉아
서, 가구 보러 다니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지,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이 기사는 가구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다루고 있다. 많은 시간을 그렇게 찾아 헤매고 나서도, 배달되려면 몇
주 혹은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 가구의 스타일과 색상이 너무도 다양해서 오히려 혼란한 지경이다. 계
절마다 가구를 바꾸는 사람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어떤 회사는 소파와 의자의 품목이
17억 가지나 된다고 한다.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종류의 천과 스타일들을 생각한다면 많은 백
만장자들이 가구를 다시 고치거나 천을 갈아서 사용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법도 하다.
아니라 6촌까지 방계가족도 포함하기에
로마의 하층민은, 심지어 노예까지도 자유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합법적인 가정(가
족)을 꾸려나갈 만한 능력이 없었다. 오직 지배계급만이 제도에 맞는 진정한 의미의 가정
을 가질 수 있었다. 가정에서 가장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가문의 명성과 권위, 제사, 유산
에 대해 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로마의 가장은 노예를 포함한 집안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엄
청난 권한을 행사했다. 가정 내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가장은 유산을 물려주고, 결혼과 입
양 등을 통해 가문을 이어나가고, 도시국가를 존속케 하는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가장이
자신의 아들에게 이러한 권력을 물려주기로 결정하고 나면, 그때부터 아이의 교육을 가장이
직접 담당했다.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시민으로서, 그리
고 사회의 지도적 인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가족의 범위는 직계가족뿐
이른다. 실제로 로마 가정의 전형은 한 증조부의 후손 3대가 모여 사는 형태였다. BC 2세
기경에 아일리 투베로네스 일가는 열세 가족이 같은 집에서 살았다. 노예나 해방된 노예들
도-라틴어로 가족을 가리키는 파밀리아(familia)는 종종 이들만을 가리키는 데 쓰이기도 했
다- 가족의 일원이었다. 전통적으로 한 가족을 이루는 사람들은- 아내, 아이, 노예는 물론
이고 때로 자유노예까지 포함하여- 한 집에 사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상류층에서는 결혼한 아들이 대개 분가해 살았으며, 생활비조로 부모에게 재산을
받아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을 했든 안했든 상관없이 아들들은 독자적인 결정권이 없
었다. 그들의 재산은 모두 아버지의 소유로 되어 있었고, 아버지가 죽은 후에야 그들의 것
이 될 수 있었다.
고대 사회에서 딸은 결혼하면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남편의 영향권 아래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에 접어들면서 아내가 남편의 영향권 내에 있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타나
고 있다. 이런 현상은 법적인 여성해방의 추세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결혼하고도 계속
해서 아버지의 영향권 아래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물론 부부재산제의 점진적인
확산이 실질적인 여성해방과 맞물려 있는 경우는 종종 있다.) 여러 가지 형태의 결혼식
딸의 경우에는 12-16세 사이에 혼사를 정했고, 아들도 대체로 18세 전후해서 결혼을 했
다. 제정기에는 원로원 가문이라는 좁은 범위 내에서 선택해야 하는 행정관은 대략 첫 임
기가 시작되는 24세 경에나 결혼을 했다. 결혼식에는 여러 형태가 있었다(단, 그만한 능력
을 갖춘 사람의 경우에만 그랬다). 가장 격식있는 형태는 콘파레아티오라는 결혼 종교의식
이었다.
10명의 증인이 참석한 가운데 제물까지 바쳤던 이 의식은 점차 세습귀족들 사이에서만 전
해 오다가 공화정 말기에 사라진다. 또 다른 형태로, 5명 이상의 증인 앞에서 신랑이 신부
를 사오는 형식으로 진행하는 결혼식이 있었다. 이는 남자가 신부의 아버지에게 딸을 데려
오는 대가로 돈을 준 고대의 관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가장 흔했던 형태는 우수스(usus: 라
틴어로 "사용"이라는 의미)라는 이름의 결혼식이었는데, 여자가 1년 동안 남자 가족과 같이
살아본 다음에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같이 법적인 결혼식을 올리
는 사람은 로마인들 중 살기가 괜찮은 일부에 불과했다. 로마에 살고 있던 그 밖의 외국인
들은 나름대로의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부유한 로마인들은 평균 3번 정도 결혼을 했다. 여성의 사망률이 높고 이혼이 쉬운 탓도
이었지만, 단지 문서상으로만 부부인 경우도 있었다. 결혼 여부는 일반적으로 가장들이 결
정했으므로 개인의 감정이나 사랑과는 무관했다. 결혼이란 그저 양쪽 집안의 우호를 증진
시키고 가문을 이어나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는데, 집안의 세습재산이 많을수록 그런 경향
이 심했다. 그러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의무를 지켜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은 젊
은이들의 책임감이 줄어들었다거나 로마의 결혼풍속이 붕괴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높은 아동
사망률 때문이다. 로마에서 태어난 아이가 유아기를 무사히 지낼 확률은 3분의 2밖에 되지
않았고, 20세까지 살아남는 아니는 그 절반에 불과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의 수가
20대를 넘어서 점차 감소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로마인들이 아내를 서로 교환하거나 임신한
여자와 결혼했던 이유를 알만한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카토의 일화는 유명하다. BC 1세
기경의 정치가였던 카토는 호르텐시우스가 임신한 자기 아내와 결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후 호루텐시우스가 죽자, 그는 옛 아내와 다시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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